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테오 리치 (문단 편집) === 천주실의[anchor(천주실의)] === 마테오 리치는 [[중국인]]들의 취향에 맞도록 [[유교]] 경전을 인용하면서 [[선교]]를 벌였고, 체계적인 내세관 교리가 있어 [[가톨릭]]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[[불교]]를 공박하여 가톨릭의 우위를 알리는 한편[* 다름이 아니라 불교의 윤회교리를 그리스 철학자 [[피타고라스]]가 주장한 그걸 베낀 거라고 생각했다.(...)], 유교에 대해서는 종교보다 철학 사상에 가깝게 보아 관대한 태도를 취해 [[제사]]와 같은 유교적 행사도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양보하여 예수회가 중국에서 포교하기 쉽도록 만들었다. 조상제사 문제는 이후 70여년 넘게 이것이 미신적 요소를 분리할 수 없는 조상숭배인지, 용인가능한 수준의 조상에 대한 공경일 뿐인지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극심했으며, 결국 조상숭배, 미신적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[[교황청]]의 결정에 의해 18세기 초부터는 200여년간 동아시아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된다. 이 때문에 [[청나라]] 시기의 가톨릭 박해와 [[조선의 천주교 박해|조선에서의 여러 가톨릭 박해]]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. 다만 현대에 들어 1939년 이후의 현대 교황청에서는 이제는 과거와 달리 조상제사에서 조상숭배적 가치관이 많이 옅어졌다고 판단하고, 단순한 가문의 전통의 선에서 '천주교에서 인가한 양식'으로 신주 같은 유교적 요소를 뺀 조상[[제사]]를 치르는 것은 조건부로 허용해주고 있다. 한편, 마테오 리치는 [[기독교]]의 유일신을 한자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. 그는 [[중국어]]의 어떤 단어도 기독교의 신 개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, 마테오 리치는 오랜 고민 끝에 유교 경전에도 나오는 천주라는 단어를 선택했다. 이 선택은 풍응경(馮應京)이 『천주실의(天主實義)』 서문에 썼듯이 리치가 ‘이중화중(以中化中)’의 태도, 중국을 빌려 중국을 변화시키는 유연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. 그 결과 마테오 리치의 사후 40년 동안 중국인 [[가톨릭]] 신자 수는 15만 명으로 늘어났다.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글은 [[조선]]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.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『기하원본』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, 저서 『천주실의』 역시 [[조선]]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한 [[이수광(조선)|이수광]]이 저서 [[지봉유설]]에서 처음 소개한 이래로 널리 퍼져, [[천주교]]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.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[[이익(실학자)|이익]]은 『천주실의』를 읽고 천주교를 [[불교]]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.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.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과 상제 개념을 천주와 함께 사용했는데, 이에 [[도미니코회]]와 [[프란치스코회]]에서는 말이 되냐고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서 천주 이외의 호칭을 금했다. 하지만 그건 100년이 지난 뒤고, 당대에는 이러한 선교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. 왜냐하면 조선 실학자들은 마테오 리치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. 이는 [[정하상]] 바오로가 쓴 『[[상재상서]]』에서 당대 조선인들이 상제/천을 천주와 동일시했으며 혼용해 사용하는 것으로 신앙을 설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. 현대 [[대한민국]]에서만 보더라도 '천주'라는 호칭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, '천주교'라는 교회의 이름으로도 살아남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